어떤 모쏠의 편지

695197No.158892018.12.28 18:31

내가 많이 답답했을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름의 이유가 있었거든.

너를 좋아하기 전에, 한 아이와 친해졌었어. 정확히는, 그 아이가 내게 친근하게 굴었어. 내가 생각한 수준 이상으로 말이야. 처음엔 적당히 상대했어. 하지만 관심사가 비슷했고, 그 아이는 나를 존경했었지. 나도 사람인지라 아닌척해도 그런 관심이 좋았어. 부끄럽게도 내 감정은 선을 넘어버렸지. 어리석은 확신을 해버렸어. 그 아이도 나랑 같을 거라는. 어느 정도 집착하는 모습까지도 보여버렸어. 그 아이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선을 넘어버리자, 그 아이는 나를 피했어. 안 그래도 불안했던 내 남자로서의 자존감은 아예 사라졌어. 아, 걱정하지 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냥 객관적으로 보는 거야. 난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거지. 그래도 인간으로썬 꽤나 멋지다고 생각해.

시간이 지나니 무뎌졌어. 생각할 여유가 생겼지. 나는 왜 그랬으며,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많이 바랬어.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이 서로 싸우기만 할 뿐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일까? 표현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표현을 받지도 못했어. 그래 난 애정결핍인 거야. 그렇다면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나는 깨달았어. 당연한 사실이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표현 방식이란 게 존재한단걸. 내 기준에서는 호감의 표시라 느낄 법한 행동을, 단순히 친근감의 표현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던 거지. 그래서 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하건, 그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생각으로 했는지를.

네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돌이켜보면, 많이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난 판단할 수 없었어. 섣부른 판단이 관계를 무너뜨릴 테니까. 하지만, 그만큼 나도 열심히 했어. 내 행동의 의도가 명확해질 수 있도록. 네가 의심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도록 말이야. 실제로 넌 알고 있었고.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았었지.

그때의 나는 단념했었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너는 내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어. 생각해봐. 나는 키도 작고 못생겼잖아? 게다가 이질적이고. 차라리 네가 내게 관심이 없을 확률이 높다 생각했어. 9 대 1로.

내가 진로를 정하고, 내 공부를 하기 시작하니, 점차 너와 멀어지기 시작했어. 어쩔 수 없었어. 집안 형편 상 일찍 독립을 해야 했었거든. 강의비를 어느 정도 충당하려고 국비 지원을 받아보기도 하면서 나는 학교 밖의 사람이 되어버렸지. 게다가 너 역시 입시 준비를 해야 했었고.

네가 그 녀석과 사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조금 동요했어. 나답지 않게. 배신감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화나거나 그러진 않았어. 내가 너에게 뭐라고 화를 내겠니?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 녀석이란 건 좀 의외였어. 둘이 그런 낌새도 없었다 생각했는데.

아까 한말 취소할게. 조금이 아니라, 많이 동요했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지. 가뜩이나 진로 문제로 복잡했는데, 크리티컬을 맞았나 봐. 갑자기 운동을 죽도록 하게 되더라. 6개월 동안. 그 덕분에 10여 키로를 뺐지. 근데 극적인 변화는 없더라. 나 못생긴 거 맞나 봐. 좀 더 빼고, 유지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그 뒤로 시간이 흐르고 너는 헤어졌더라.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당황스러웠어. 그때 네가 할 말 있지 않냐고 묻던데, 뭘 뜻하는진 나도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나는 학교 밖에 있는 데다, 졸업 후에 바로 서울로 가 내 일을 시작할 텐데. 끝이 뻔한 관계를 어찌 이어가겠어. 마지막 기회도 내가 버렸네.

돈을 벌기 시작하니, 네게 몇 번 선물도 해줄 수 있었어. 직접 줄 순 없었지만, 톡으로 나마 기쁨을 표현하는 널 보니 정말 좋았어. 문제가 있을 때 내게 도움을 구하는 것도 날 의지하는 것 같아 좋았고.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너는 갑작스럽게 연락을 했다가, 끊어져. 그리고 다시 갑자기 연락이 오지. 어떨 땐 일주일 간격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더라고.

이렇게 말하니 꼭 네가 날 호구 취급하는 것 같네. 그런 의도는 아니야. 네가 그런 사람 아니란 걸 내가 잘 알아. 하지만,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고, 가끔 이어지는 대화조차도 하루 간격으로 드문드문하다면,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이제 그만해야 할 때라는 걸 알겠더라.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할 순 없지. 그래도 사과 정도는 하고 싶어.

나름의 표현이랍시고 부담스럽게 한 것 같아 미안했어.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힘들다고 연락했을 때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해 미안했어. 위로하는 법을 못 배웠거든.
네가 준 선물 잃어버려서 미안했어. 수없이 찾아봤는데 없더라. 몇 년간 소중하게 간직했었는데.

몸이 멀어지고, 연락도 서서히 끊기자, 마음도 천천히 식어갔어. 나는 어쩔 수 없는 개인주의적인 놈이라서, 결국 내 인생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지. 너도 그런 내 모습이 멋지다고 했었고.

내 모든 행동들은 너와 연애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네가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졌으면 한 거야. 예전에 종종 힘들거나 문제가 있을 때 나를 찾았었잖아. 이제 나를 찾지 않는 걸 보니 힘들지 않나 봐. 다행이야.

앞으론 네가 날 찾기 전에 내가 네게 뭔가 해줄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날 찾는다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볼게.

이젠 너를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아마도, 널 그냥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예전부터 여동생이 있었으면 정말 잘해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게 해준 걸 보니, 진짜라고 느껴지네.

나 진짜 이상하지? 나도 알아. 너도 알고. 우린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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