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06학번이다. 나때 악기바리는 이랬다.

571277No.408372022.06.07 14:09

읽기바리.



철학과 아쎄이들의 독(讀)기를 키우는 전통.



전공 배정 받고 나서 선배들 앞에서 책이나 논문을 그냥 쥐어 들고 제대로 숨 쉴 새도 없이 악으로 몇백쪽씩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



철모르던 아쎄이시절 나도 빙 둘러앉은 선배들 앞에서 순수이성비판과 각종 논문들 거의 7편을 읽어야했고



까끌까끌한 독일어를 허겁지겁 물도없이 계속 읽느라 입천장이 까져서 계속 아렸다



세 권째 읽는데 목구멍에 거친 r발음이 확 느껴지면서 가래 끓는 소리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위액섞인 가래침을 입에 물고 얼굴이벌게져서 있는데



칸근출 교수님이 호랑이처럼 달려와서 내 가슴팍을 걷어차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당연히 입에 머금고있던 가래침과 논문은 좆같은 r발음과 함께 바닥에 뿜어졌다



나는 그날 칸근출 교수님께 반바보 되도록 맞았다.



구타가 끝나고



칸근출 교수님이 바닥에 떨어진 논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으로 읽어라"



"니가 선택해서 온 철학과다. 악으로 읽어라."



나는 공포에 질려서 무슨 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논문을 주워읽었고



칸근출 교수님의 감독 하에 남은 단행본까지 전부 읽었다.



그날 밤에 칸근출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담배 두개를 물고 불을 붙여 한 개비를 건네주며 말했다.



"바닥에 흘린 니 논문을 아무도 대신 읽어주지 않는다.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다. 아무도 니 무지를 묵인하고 넘어가주지 않는다. 여기 철학과에서뿐만이 아니다. 학계가 그렇다. 아무도 니가 흘린 글 대신 공부하고 읽어주지 않아.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식하지 않도록 악으로 깡으로 이 악물고 배우는 거고, 그래도 빵꾸가 난다면 니 전공은 니가 찾아서 공부해야 돼.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아. 그래서 다시 읽으라 한거다."



"명심해라. 예지계적 존재는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책임을 피하지 않는다."(GMS, 4:410)



그날 나는 소주를 먹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난 그날 논문 몇 편에 절대정신을 배웠고 절대정신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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